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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몽골몽골, 우리의 여름

9-4. 밤에 게르에서 혼자

by 이냐니뇨 2023. 10. 22.

하루가 유난히 길었다. 당장 하고 싶은 건 역시 뜨거운 물로 씻고 뽀송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 한국에서는 사소한 일상이지만 몽골에선 그렇지 않다(플래그🚩). 온수가 있으면 감사해야 하는 곳, 공용 샤워장에 옷을 가지고 가서 씻다 보면 옷이 눅눅해지는 곳이 바로 몽골이다. 게다가 밖에는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나가기가 번거로워서 비가 잦아들고 난 뒤에 씻으러 가고 싶었지만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기엔 너무 추워서 더 기다릴 수 없어 길을 나섰다. 알고 보니 날씨 때문인지 휴가 성수기가 지나고 있기 때문인지 캠프 전체에 손님이 거의 없는 둣했다. 여행사에서도 알아서 놀라고 나를 두고 갔고, 내일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비가 오니 어차피 캠프파이어는 없었겠지만 한 명만 예약하면 손해를 본다는 지극히 본인 입장에서의 설명 말고는 아무런 설명이 없이 혼자 남겨져서 당황스러웠다. 여행 내내 친구들과 함께 왁자지껄하다가 갑작스럽게 고요해지니 어색하기도 했다.

 

어쨌든 씻으러 갔는데 샤워장에 사우나가 있길래 몹시 기뻐했으나, 물어보니 손님이 둘 이상이어야 불을 떼주신다고 하는 것 같았다(켜달라고 했다가 한국어나 영어를 전혀 못하는 직원 분이 말씀해주셔서 소통을 중단했었다). 심지어는 샤워장 문도 잠겨 있어서 데스크에 가서 열어 달라고 해야 했다.

 

조금 불편하고 아쉬웠지만 사람이 없으니 샤워장을 편하게 쓸 수 있어 만족했다. 최대한 뜨거운 물로 씻었는데 다행히 뜨거운 물도 콸콸 잘 나왔다. 씻고 있자니 엉덩이가 이상하게 아팠는데, 확인해보니까 아까 말을 탈 때 안장에 쓸린 모양이었다. 씻기 전까지는 아픈 줄도 몰랐는데 물이 닿고 나니 계속 쓰린 기운이 느껴졌다. 푸르공 일정이 끝난 뒤에 다쳐서 다행이었다. 이 엉덩이로 덜컹거리는 푸르공을 탔으면 어땠을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게르는 몹시 훌륭했다. 난로가 아니라 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곳이고 전기 포트랑 냉장고도 있었다. 따뜻한 물에 샤워도 했겠다, 화룡점정으로 가져갔던 핫초코를 타 마시면서 몸을 녹였다. 게다가 소파라니! 거울과 화장대라니! 게르에서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침대도 더블보다 큰 것 같았다. 집에서 쓰는 슈퍼싱글 침대보다 큰 침대에 감격 또 감격. 눅눅해진 옷도 말릴 겸 얼른 보일러를 켰다. 혼자 난로를 지키려면 너무 외로웠을 것 같은데 다행스러웠다.

 

 

 

그런 생각도 잠시. 쏟아지는 빗줄기가 심상치 않다 싶었지만 그동안 그래왔듯 곧 지나갈 구름이라고 생각하고 곧 지나가길 기다리며 일기도 쓰고 짐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불도 꺼지고 보일러도 꺼지고. 곧 고쳐지겠지, 생각하면서 헤드랜턴에 의지해서 일기도 마저 쓰고 책도 읽다가 밥이나 먹고 와야겠다 싶어서 식당으로 갔다.

 

 

아, 이럴 수가. 식당도 정전이었다. 볶음밥 같은 밥 종류를 먹고 싶었는데 전기밥솥을 쓸 수 없어 밥 종류를 주문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아쉬운 대로 양갈비 구이를 시켰다. 주문하면서 전기가 나가서 추우니 따뜻한 물이나 차를 줄 수 있냐고 물었던 것이 마음에 쓰였는지 사장님이 차를 준비해주셨다(왕창). 그뿐 아니라 브로콜리 수프도 끓여 주셨다. 믹서기가 안 되어 손으로 다졌는지 질감이 느껴지는 수프였지만 따뜻해서 너무 좋았다. 마음을 써주신 게 너무 감사할 뿐이었다. 역시 몽골답게 양이 많았지만 고마운 마음에 싹싹 긁어먹었다.

 

메인 메뉴로 나온 양갈비 구이도 정말 맛있었다. 몽골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세련되고 익숙하게 맛있는 맛이었다. 양파가 같이 구워져서 나왔는데 양파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역시나 양이 충분해서 저녁을 든든하게 먹을 수 있었다. 정말 몽골에서 돌아가면 몸무게가 늘어 있을 것 같다.

 

구름이 많이 끼어서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길어지는 정전에 테이블에 하나 둘 초를 켜주셨다. 켜놓은 촛불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좀 춥긴 했어도 분위기가 좋아서 그 또한 마음에 들었다.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 정전과 비 때문에 다른 일정이 없어진 나는 아주 천천히 음식을 즐기고 풍경을 즐기며 밥을 먹었다. 몽골에서 먹어본 것 중 최고의 만찬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정전 때문에 카드기도 쓸 수 없어서 결제는 내일 아침으로 미루었다. 정전이 언제 끝날 지 몰라 걱정된다며 방에서 쓸 예쁜 초도 건네주셨다. 생각도 못했는데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다. 방에 초를 켜놓고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분위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날은 점점 추워지는데 전기가 돌아오지 않아 혹시 몰라 챙겨 왔던 핫팩 하나를 꺼냈다. 밤마다 오히려 난로와 싸우느라 쓸 일이 없었는데 가져온 걸 쓸 수 있다니 보람찼다.

 

빗소리를 들으며 여유를 부리다가 새벽에 구름이 걷히고 별을 볼 수 있길 기대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낮동안 신나게 말도 타고 추위에 떨었더니 배가 불러오자 금세 노곤해지기도 했다. 더없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다른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아쉬움은 남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힐링이었다.

 

 

 

 

다행히 전기는 밤 11시 쯤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이미 모든 걸 포기하고 초가 다 닳아버리기 전에 잠을 청했던 터라 비몽사몽한 상태였지만, 새벽이 다가오기 전에 난방이 다시 되어 다행이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몽골은 이렇게나 밀당을 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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