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쉬려던 계획과는 달리 오후 2시쯤이 되어서야 오늘의 캠프(Maikhan Tologoi)에 도착했다. 푸르공을 타고 다니면서는 예상 시간을 지킨 적이 없는 것 같다. 2시가 다 되어 점심을 먹는 일은 일상이었다. 이렇게 여행을 하다 보니 몽골 사람들에게 철저한 시간 개념이 없다는 말이 절절히 와닿았다. 어느덧 시계조차 잘 보지 않게 되기도 했고 잘 놀고 돌아오는 길이라 늦어진 데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다만 트레킹을 하고 난 뒤에 시간이 늦어지다 보니 배가 몹시 고팠다.
이번 캠프는 호숫가 바로 앞에 있어 뷰가 아주 좋았고 게르도 널찍하고 깔끔했다(물가라 날파리는 많았다). 홉스골에서는 캠프가 더 크고 우리 게르가 안쪽에 있어서 숙소에서 호수가 보이지는 않았는데, 여기서는 호숫가에 있는 게르를 배정 받았다. 덕분에 문을 열면 바로 호수가 보였다. 홉스골만큼은 아니지만 테르힝 차강 호수도 아주 큰 호수라서 탁 트인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마치 일부러 장소를 골라 텐트를 친다면 고르려고 했을 법한 곳이었다. 바로 뒤쪽에 캠프 식당도 있어서 쾌적한 동선이 완성되었다.
캠프 구경은 조금 미뤄두기로 하고 주린 배를 부여 잡고 캠프 식당으로 향했다. 몽골에서 만난 캠프 식당은 모두 창이 크고 바깥 풍경이 푸릇푸릇해서 아름다웠지만 이번 캠프 식당에서 보이는 풍경은 훨씬 예뻤다. 테라스에 앉아서 먹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바깥 풍경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몽골에선 먹기 쉽지 않았던 닭고기 요리가 나온 것도 반가워서 오늘도 산더미 같은 양의 점심식사를 싹싹 긁어먹었다. 내 인생에서 소 혀(우설) 요리를 처음 먹어 보는 역사적인 식사이기도 했다.
캠프마다 식당에 냉장고가 있어서 음료수나 맥주를 판다. 낮에 도착한 우리는 미지근한 맥주를 가져가는 대신 캠프에서 맥주를 사먹어보기로 했다. 한 캔에 9천 투그릭이라는, 마트에 비해 몇 배나 되는 가격이었지만 오랜만에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를 먹게 되었다는 것에 몹시 설렜다.
몽골에서는 별 것 아닌 것에도 감동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심지어 이날 캠프 화장실 세면대 수전이 센서로 동작하는 것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아무 감흥 없이 보던 것인데도 몽골에서는 감동과 감탄을 가득 느끼게 된다. 캠프 화장실과 샤워실도 24시간 운영이었고 화장실에 휴지도 마련되어 있는 걸 보면서 우린 박수를 쳤다. 이런 긍정 파워가 우리의 여행을 풍족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호숫가에 벤치와 피크닉 테이블이 있어서 시원한 맥주를 사들고 나가 맥주를 홀짝이며 물멍 시간을 가졌다. 하늘이 파랗고 날씨가 좋아 보이지만 물가라서 그런지 생각보단 날씨가 쌀쌀했다(곧 소나기가 왔다). 홉스골 이후 처음으로 낮시간에 누리는 자유시간이라 가이드님도 한쪽에서 일광욕을 하며 여유를 만끽하시는 듯했다.
우리는 같이 수다를 떨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다가, 각자 책을 보거나 그동안 얼마 쓰지 못한 일기를 쓰면서 따로 또 같이 보내는 시간을 가졌다.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습하지 않고 산뜻했다. 하루하루 얼굴과 손이 까매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지만 이런 풍경과 날씨를 놓치고 지나가기엔 아쉬움이 컸으므로 그냥 한국에서 화장품을 새로 사야지, 생각했다(실제로 너무 많이 타서 원래 쓰던 파운데이션을 쓰지 못하게 됐고, 요즘은 호수가 없는 투명 비비를 사서 쓰고 있다).
맥주캔을 다 비울 때 쯤 급격하게 구름이 몰려오더니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홉스골에서 변덕스런 몽골 호수의 날씨를 충분히 경험한 우리는 능숙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게르로 들어갔다. 게르 안에 테이블이 있어서 자리를 깔고 보드게임을 시작했다.
몽골에선 딱히 게르 안에서 할 일이 없다기에 보드게임을 여러 개 챙겨 갔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는 않아서 게임을 오래 하진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번씩 하기 좋았다. 이걸로 소소한 내기도 하고, 오늘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잘 보냈다. 플레이 시간이 길고 복잡한 게임보다는 규칙을 이해하기 쉽고 플레이 시간이 짧은 보드게임이 몽골에서 하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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