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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몽골몽골, 우리의 여름

5-1. 초원과 화장실의 상관관계

by 이냐니뇨 2023. 9. 6.

 
 
또다시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여행지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좋아하는 나라서 조금 더 빨리 일어나 해가 뜨기를 기다려 봤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해는 조금 늦게 나타났다. 게르 위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해가 떠오르고 짐을 정리한 뒤 아침을 먹으러 나왔다. 아침으로 따뜻한 우유와 그래놀라, 달지 않은 빵과 잼이 나왔다. 잼도 많이 달지 않고 오히려 상큼해서 아침으로 먹기 부담스럽지 않았다. 으름(Urum)이라고 불리는 몽골식 버터도 매끼 나왔는데 흔히 먹는 버터보다 담백하고 덜 기름진데다 간이 없어서 많이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바르면 스프레드 버터처럼 좀더 부드러운 느낌이었는데,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맛이 잼과 잘 어울렸다. 몽골의 땅은 쌀을 키우기엔 너무 추워서 밀을 더 많이 먹는다고 하는데, 그 밀로 이렇게 거칠고 구수한 빵을 만들어 조식으로 먹는 문화는 바로 옆인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몹시 가까운데, 중국같은 아시아 나라의 문화보다는 러시아 문화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은 게 신기했다.

 

아침에 나온 우유는 가이드님께 들어보니 캠프에서 직접 짠 젖이라고 하셨다. 아마도 시골이라 우유를 사러 마트까지 가기 힘드니 키우는 가축의 젖을 직접 짜서 끓여 내오는 것 같았다. 공장 가공을 하지 않은 우유는 냄새가 더 진했고 기름 같은 것이 살짝 떠있었다. 그래도 고소하니 맛있었고 쌀쌀한 아침에 따뜻한 우유를 마시니 속이 따뜻해져서 좋았다. 한국에서도 겨울이 오면 우유를 데워 먹어야겠다고, 우리들만의 몽골 추억 의식을 하나 더 만들었다.
 
 

 
 
오늘은 가이드님과의 의논 후에 아침 일찍, 8시쯤에 출발해 일찍 캠프에 도착해서 쉬자고 했다. 몽골의 여행은 이동거리가 길어 6~7시간 차를 타는 건 예삿일이고 홉스골 호수를 빼고는 모두 1박이었는데, 그나마 이동거리가 짧은 날이라 차라리 부지런히 움직인 뒤에 캠프에서 점심을 먹고 오래 쉬자고 한 것이다.
 
가는 길에 기사님께서는 어워(몽골의 산신당 같은 곳)에 들러 빵을 놓아주며 안전을 기원하셨다. 우리도 감사한 마음으로 같이 소원을 빈 뒤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도 몽골은 어제와는 조금 다른, 하지만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우릴 반겨줬다.
 
 

 
 
오늘의 캠프는 테르힝 차강 호숫가에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가기 전에 우선 테르힝 터거라고 하는 분화구에 들러 트레킹을 하고 가기로 했다. 테르힝 화산이 옛날에 크게 터지면서 오늘날의 분화구가 만들어졌다. 테르힝 차강 호수는 이 화산 폭발의 영향으로 생긴 거라고 했다. 멀리서도 잘 보일만큼 호수의 규모가 커서 폭발의 위력을 짐작하게 했다.
 
 
호수까지 3시간 정도가 걸렸던 것 같아서 화장실에 들렀다 올라가자고 했는데, 역시 몽골. 공중 화장실은 있었는데(유료였음) 관리하시는 분이 어디 갔는데 보이질 않았고, 그래서 화장실 문이 잠겨 있었다. 좀 기다려봤지만 관리하시는 분은 나오지 않았고 드디어 진짜 몽골의 화장실을 체험할 시간이 왔다.
 
우리는 가이드 님을 따라 입구에서 떨어진 평지로 길을 옮겼고 덤불과 돌들을 칸막이 삼아 일을 봐야 했다. 앞서간 선배님들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던 것으로 보아 아마 여기가 비공식 화장실이었나보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뷰가 좋았던 화장실이었다.
 
 

아름다운 테르힝 터거 분화구와 뷰 좋은 화장실.

 
 
가뿐한 마음으로 오늘의 트레킹 시작. 화산지대라 여기저기 현무암이 많아서 또 다른 분위기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날씨가 좋아서일까, 트레킹을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처음 갔던 오랑 터거보다 길이 잘 닦여 있어 올라가기 어렵지 않았고 20분 정도만 올라가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여기서는 경로를 알려주는 표지판도 있었는데, 몽골을 여행하면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문명이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등산로처럼 계단을 만들어 두거나 길을 정비해 놓은 곳이 아니라 미끄러지기 쉬우니 반드시 운동화(가능하면 트레킹화)를 신고 올라가는 게 좋다. 날이 더운데다 작은 침엽수만 가득한 곳이라 그늘은 별로 없었는데, 그래서 짧은 길도 힘들게 느껴졌던 것 같다. 햇살이 얼마나 따갑던지. 모자를 안 썼으면 오늘도 새까맣게 탈 뻔했다.
 
 

 
 
그래도 가는 길은 몹시 예뻤다. 구름맛집 몽골답게 산 위로 구름이 몽글몽글 걸쳐진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 콕 찍으면 달콤하고 부드러울 것 같은 느낌. 작은 나무들도 장난감 같아서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어느덧 눈앞에 펼쳐진 정상의 모습. 엄청난 폭발의 위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깊고 넓은 구덩이가 생겼는데, 그 가파른 길로 내려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분화구의 규모와는 달리 호수에 물은 정말 조금만 차 있어서 한겨울의 한라산 천지 같았다. 그 모습도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정상의 풍경과 멀리 보이는 테르힝 차강 호수

 
 
오늘 우리의 드레스코드는 핑크. 한국에서부터 핑크색 아이템을 하나씩 가져가자고 얘기했는데, 드디어 입을 날이 왔다. 나 다른 한 친구는 핑크색 바지와 모자를, 또 다른 친구는 핑크색 셔츠를 입고 왔다. 신기하게도 다들 다른 핑크색을 입었는데 모두 화사해서 기분이 좋다. 푸른 초원과 회색빛 돌들이 가득한 풍경에서 핑크색 옷을 입으니 사진이 정말 잘 나왔다.
 
나는 핫핑크 바지를 입었더니 사진에서 거의 빛이 나는 수준이어서 친구들이 관종 바지라며 놀렸다. 그렇지만 어디서도 내가 잘 보이는 결과물을 보니 아주 만족스럽다. 몽골 여행에서는 밝은 옷이 사진 찍기에 좋다. 드넓은 초원이나 사막이 펼쳐지니 밝은 색을 입고 있으면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단색의 흰 티나 빨강, 주황, 노랑, 파랑 같은 원색이 사진에 아주 잘 나온다(그래서 다 챙겨 갔지). 무엇보다 역시 핫핑크 대 추천!
 
 

핑크색 입은 우리들.

 
 
분화구 아래쪽으로 내려와 보니 우리나라의 등산로 입구처럼 작은 음식점과 기념품 파는 매대가 줄지어 서있었다. 여기에도 크로스백이랑 팔찌 같은 것들이 있어 구경을 했는데, 그중 테르힝 터거에서 나온 돌로 만든 팔찌들도 있었다. 너무 귀여워서 하나 집어온 뒤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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