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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몽골몽골, 우리의 여름

3-3. 평화롭고 소란스러운 시간

by 이냐니뇨 2023. 9. 1.

보트를 타고 돌아오는 길엔 호수 위로 두터운 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호숫가라 그런지 구름이 뭉치는 속도가 빨랐다. 우리가 가는 방향 쪽으로 구름이 모여드는가 싶더니 곧 머리 위로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흐린 날씨에는 반바지를 입고 보트를 타긴 꽤나 쌀쌀했다. 그래도 소원의 섬 일정을 다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빗방울을 만난 건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맑은 물 위로 빗방울이 톡톡, 예쁘게 떨어지는 것을 조금 보고 있다 보니 곧 비가 그쳤다. 타이밍 좋게 비가 그친 덕분에 캠프 앞에 펼쳐진 작은 기념품 장터를 구경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낙타 양말이나 목도리 같은 기념품들이 있었고 여기선 작은 낙타 인형들도 보였다. 가격은 어제 만난 기념품들과 비슷했다. 아마도 기념품들은 정찰제에 가깝게 비슷한 가격으로 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마음에 드는 게 보이면 사는 게 진리. 이번엔 색색의 팔찌들이 있어서 눈이 돌아갔고 이것도 하나씩 나눠했다(3개 산다고 살짝 흥정하고 개당 10,000 투그릭). 

 

 

소소했던 장터와 충동구매의 현장. 사진으로 보니 벌써 손이 많이 탔다.

 

 

그리고 우리를 기다린 점심 식사. 투어를 하고 났더니 배가 몹시 고파와서(차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을 때도 고팠던 배..) 점심이 무척 기다려졌다. 역시나 샐러드가 먼저 나왔고 그 뒤를 이어 본식이 나왔는데 본식은 라멘과 비슷한 국물 있는 면요리였다. 조금 전에 비가 떨어진 쌀쌀한 날씨에 무척 잘 어울리는 메뉴라 감동하며 맛있게 먹었다. 몽골음식이 대체로 그렇듯 달거나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이었다. 오늘 음식도 대만족. 마침 안에 들어와 식사를 시작하자 밖에는 거센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로 음식의 양이 아쉬웠다. 어딜 가나 밥이나 면을 산더미처럼 쌓아 주던 몽골인데... 여긴 관광지라 음식 양도 여행객들에게 맞춰져 있나, 국물에 밥이라도 말아먹으면 맛있겠다,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릇이 치워지고 디저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우리 앞에 놓인 건 디저트가 아니라 2차 본식이었다. 불고기 덮밥과 비슷한 소고기 볶음과 밥. 심지어 밥도 산더미. 이게 뭐지? 그렇다. 산더미처럼 밥을 먹는 몽골에서 앞서 나온 면 요리는 수프일 뿐이었던 것이었다. 놀라고 있으려니 가이드님은 원래 점심 코스는 이렇게 주는 곳이 많다고 하셨다. 아니 몽골 사람들 위는 대체 얼마나 큰 거지? 어디 가서 적게 먹는다는 소리는 안 듣고 사는 나였는데, 이건 좀 당황스러운 참이었다. 어딘가에서 본, 그 옛날 세숫대야 같은 그릇에 밥을 산처럼 쌓아놓고 앉아 있던 선조의 사진이 떠올랐다.

 

어쨌든 밥을 말아 먹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배가 덜 찼던 나에게 다음 요리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었다. 맛은 불고기 덮밥 그 자체. 반갑게,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잘 먹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싹싹 긁어먹던 우리도, 이번엔 너무 많아서 다 먹진 못했다. 사진엔 없지만 매끼 샐러드와 함께 식전 빵도 나왔는데 이것도 한 입 먹은 뒤였기 때문이다.

 

점심은 메인 요리가 2개 나오는 대신 디저트가 없었다. 대신 나는 늘 나오는 홍차에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커피용 프림, 설탕을 넣어 밀크티를 만들어 자체 디저트를 먹었다. 급격하게 추워진 날씨와 소원의 섬에서 걷고 난 뒤라 따뜻하고 달콤한 밀크티가 혈관에 도는 것이 느껴졌을 때는 정말 극락이었다. 우리는 모두 배를 두드리며 식사를 마쳤다.

 

 

 

 

금방 지나갈 것 같은 소나기였는데 식사를 마친 뒤에도 여전히 맹렬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글바글한 식당에 앉아 식사를 하는 바람에 더워졌던 우리는 시원하게 바람도 쐴 겸 테라스 자리에 앉아 비가 그치길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뭐지? 투둑투둑, 낯선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풀밭 위에 뭔가 덩어리가 떨어졌다. 우박이었다. 세상에. 7월에, 한여름에 우박이 내리는 것을 보게 되다니! 몽골의 날씨는 정말 드라마틱하구나. 오늘도 긍정적인 우리는 한국에서 보기도 힘든데 별 걸 다 본다며 자리에 앉아 우박이 그칠 때까지 쳐다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좋았고, 저녁까지는 특별한 일정이 없던 터라 게르에 좀 늦게 들어간다고 해서 문제가 될 일도 없었다. 이렇게나 여유를 부리는 여행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보통은 주변을 계속 둘러보고 돌아다니는 스타일인데 이렇게 쫓기지 않고 되는 대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 매력 있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우박이 그치고 게르에서 좀 쉬기도 하고 근처에서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이 새까맣게 하늘을 덮고 날도 쌀쌀했는데,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이 개고 해가 뜨면서 더워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보니 우리 캠프 위로만 구멍이 뚫린 것처럼 구름이 없었다. 다른 쪽에 또 구름이 몰려가 비를 퍼붓는 듯했다. 비가 온 직후에 맑아진 하늘을 보며 내심 무지개를 기대하며 하늘을 쳐다봤지만 아쉽게도 무지개는 뜨지 않았다. 오후 내내 짧은 소나기가 내리고 날이 개이길 반복하는 이상한 날씨였는데, 무지개는 쉽게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맑은 호수 위로 무지개가 뜬다면 정말 예쁠 텐데.

 

 

오후는 어제 게르 문 잠김 사태로 진행하지 못했던 깜짝 파티를 할 시간이기도 했다. 사실 초코파이를 사는 건 우리끼리 정한 파티 신호였는데, 다음 날로 미뤄져서 이미 눈치를 챘을까 봐 좀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축하받는 친구는 이런 것까진 생각을 못 했다고 해서 뿌듯했다.

 

그나저나 날이 습해서 기껏 챙겨간 성냥은 불이 붙지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다니며 성냥을 겨우 구했다. 친절한 분이 우리가 꽁냥 거리는 것을 보고 성냥을 맘껏 쓰라고 배려해 주셨다. 정말 감사했지만 바람이 많이 부는 몽골에서는 초에 불을 붙이기도 힘들었고 불을 겨우 옮겨 붙이니 곧바로 꺼져버렸다. 결국 우리는 불 없이 어설픈 깜짝 파티를 해치우고 디저트로 초코파이를 먹었다. 피크닉을 하려고 돗자리를 챙겨 갔지만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점심 먹고 앉아 있었던 테라스로 돌아갔다.

 

식당은 밥시간이 아닐 때는 카페로 쓰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커피를 못 먹는 나는 딸기 스무디를 주문했다. 몽골은 늘 얼음을 충분히 주지 않는데 여기에서도 친구들의 커피가 식기도 전에 얼음을 3~4알 정도 넣어주시는 바람에 넣자마자 다 녹아버리고 말았다. 직원 분께 부탁해 얼음을 가득 채워서 비로소 K-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완성되었다. 내가 시킨 음료는 왠지 건강한 맛이었다. 몽골에서 시켜 본 아이스티도 딸기스무디도 강한 단 맛은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몽골 사람들은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설탕이 몹시 비싸거나. 그래도 달지 않은 덕에 초코파이와 함께 먹기는 좋았다. 우리는 음료는 마시며 수다를 떨기도 하다가 각자 책을 보기도 하는 일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평화롭고도 소란스러운 홉스골에서의 낮이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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