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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몽골몽골, 우리의 여름

2-3. 우리의 밤과 바다(홉스골 여행자 캠프 후기)

by 이냐니뇨 2023. 8. 27.

 

 

 

 

꿈에 그리던 홉스골을 드디어 눈앞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더 짧은 일정과 사막의 예쁜 사진으로 남쪽으로 떠나는 고비 코스가 인기가 훨씬 많다고 들었는데, 우리는 망설임 없이 홉스골을 선택했었다. 생각보다 빨리 주인공을 만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설레는 마음을 감출 길은 없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오자 마법처럼 날이 맑아졌다. 점점 울창해지는 숲을 바라보며 호수에 다다를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느낄 무렵 나무 사이로 수평선이 고개를 내밀었다. 쿵쿵쿵쿵 심장이 뛴다.

 

 

 

홉스골 호수는 우리가 만났던 언덕 위의 장터에서 그 모양을 한 표지판을 지나 길을 조금만 따라 가면 만날 수 있다. 우리의 오래된 푸르공은 저 앞에 멈췄다가 다시 언덕길을 내려가기 위해 차를 밀어 시동을 걸어야 했는데, 몽골에선 이런 일이 흔한 지 길 가던 사람을 붙들고 잠깐 인사를 나누는 듯하더니 그분이 가이드님과 함께 차를 밀어주셨다. 털털 거리는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린 푸르공은 다시 맑개 갠 하늘 아래서 열기를 내뿜으며 길을 나섰다. 중간에 쉬어 가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했지만 장장 11시간이 걸렸던 오늘의 여정도 이제 끝이 보이는 듯했다.

 

기사님은 우리가 기념품 쇼핑을 하는 동안 장터에서 간식을 사셨다. 수동 기어 방식의 낡은 차인데다 엔진이 앞 좌석 가운데에 있어 열기를 뿜어 대는 푸르공을 오랜 시간 운전하려면 당 보충이 필요하신 듯했다. 몽골에는 역시 유제품이 많은데 말 젖을 발효시킨 뒤 말려 만든 아롤이라는 과자였다. 한국말을 못 하셔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지만 꽤나 정이 들었는지, 우리도 먹어보라며 과자를 나눠 주셨다. 단 맛이 거의 없어 플레인 요거트를 굳힌 것 같은 시큼한 맛이었는데 나름 매력이 있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까 봐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챙겨 주신 그 마음이 고마웠다.

 

 

몽골 전통 과자 아롤. 말젖을 게르 지붕에 말려 만든다고 한다.
홉스골에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표지판.

 

 

그리고 눈 앞에 나타난 홉스골 호수. 몽골엔 바다가 없어서 이 커다란 호수를 바다라고 부른다고 한다. 홉스골은 그들의 바다답게 끝이 보이지 않는 물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넓은 호숫가를 따라 캠프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가이드님께 들어 보니 이곳은 몽골 사람들의 여름 휴양지이기도 하다고 했다.

 

우리는 호수가 보이고도 거의 30분 여를 더 들어갔다. 가다 보니 나무들이 호수를 가려서 마음이 잠시 초조해졌는데, 곧 안쪽에 훨씬 평화롭고 예쁜 캠프가 나타났다. 호숫가에는 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말을 타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흔히 '몽골'하면 떠오르는 구수하고 투박한 이미지가 있는데, 홉스골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맑고 푸르고 평화로운 느낌. 뉴질랜드에서 여행할 때 봤던 와나카 호수와 닮은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호수의 모습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을 빛내며 밖을 볼 뿐이었다.

 

 

 

오늘 캠프는 어제보다 훨씬 훌륭했다. 호수를 바로 앞에 둔 캠프였는데 구석에 있어서 마치 프라이빗 비치 같은 느낌이었다(백사장은 아니고 자갈이었지만). 게다가 어제보다 널찍하고 방도 2명이 하나씩 쓸 수 있도록 게르 2채를 주셨다. 심지어는 게르 안에 화장실이랑 샤워기도 있었다. 긍정의 힘으로 무장해 어제 그 좁은 게르도 좋다고 잤던 우리는, 샤워실을 본 순간 그저 환호성을 내질렀다. 게르 안에 샤워기라니 정말 감동적이었다(수압은 약했다). 게다가 나는 게르 배정 내기 가위바위보에 이겨서 방을 혼자 쓰게 되었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예정한 일정보다 게르에 늦게 도착했던 터라 얼른 식사를 해야 했다. 캠프식을 먹으려면 저녁 시간에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몽골의 백야 현상이 고마워졌는데, 저녁 7시였지만 저녁을 먹은 뒤에 해가 질 걸 알았기 때문에 일정에 좀 더 여유가 있었다. 저녁을 먹고 차에서 실컷 식혀둔 맥주를 가지고 피크닉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얼른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홉스골은 캠프식마저 훌륭했다. 샐러드, 본식, 디저트로 구성된 3코스가 나왔는데 본식은 전통 몽골식은 아니고 퓨전 음식 같은 것이 나왔다. 저녁 본식 메뉴는 치킨 고로케 같은 것과 메밀 샐러드. 전반적으로 몽골 음식은 담백한 맛이었고 양도 많았다. 무엇보다 채소를 꼬박꼬박 챙겨 먹을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고로케는 익숙한 맛이었는데, 저 노란 튀김옷은 몽골 스타일인 듯했다. 점심 치킨도 저녁의 고로케도 저런 튀김옷이었다. 유제품이 뛰어난 몸골답게 안에 있는 치즈가 얼마나 고소하고 풍미가 좋았는지 모른다. 셀프바에서 소스를 이것저것 가져다 찍어 먹었는데 훌륭한 식사가 되었고 디저트까지 챙겨 먹고 나니 배가 찢어질 것 같았다. 몽골 음식에 적응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던데 우리는 너무 잘 먹어서 큰일이다. 차에 실려 다니다 밥 먹기를 반복하니 살이 찔 것 같았다.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우리의 여행 일정.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돗자리랑 맥주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확실히 북쪽이라 날씨가 맑은데도 저녁의 기온이 서늘했지만 홉스골을 눈 앞에 두고 실내에서 쉴 수는 없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호수를 바라보며 돗자리를 펴고 홉스골 바다가 만드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호수 물은 아주 맑아서 보고 있으려니 바닥의 돌까지 다 비쳐 보였다. 여름에는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기도 한다고 하니 이 곳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어졌다. 우리가 갔던 7월이 홉스골에 주어지는 단 한 달의 여름이고 6월 중순에야 호수의 물이 다 녹았다가 8~9월이 되면 다시 조금씩 추워져 물이 얼기 시작한다고 했다. 황금 같은 기회라 냅다 발을 담갔는데 물이 말 그대로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발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차가움이었다. 하루종일 차 안에서 더워하던 게 싹 사라지고 뼛속까지 개운해지는 기분을 만끽했다. 발바닥 쿨패드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홉스골 얼음 호숫물 한 번이면 발의 피로는 씻은 듯이 사라진다. 화장실이 안에 있으니 시간 걱정할 게 하나도 없고, 내일 일정도 오전 11시는 되어야 시작한다고 했다(아침 식사는 8시 반). 우리는 더 이상 추워서 못 앉아 있을 때까지 노을을 보며 여유를 만끽했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2박이라니 행복감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기다렸던 우리의 밤. 기다렸던 곳에 온 만큼 기분을 내기로 했다. 오늘 마트에서 장봐 온 에덴 맥주랑 마트에서 산 컵라면을 꺼내 마시기로 했다. 몽골의 낮은 길고 밤은 짧으니까. 긴 소풍 후 밤이 올 때쯤이면 다시 출출해질 터였다. 호숫가라 날이 춥다 보니 라면이 얼마나 맛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마침 숙소에 접시도 있고 해서 레몬도 썰고 얼음도 채워 상을 차렸다.

 

라면 물은 저녁 먹을 때 가이드님을 통해 캠프에 미리 말을 해두었다. 몽골은 따뜻한 차를 자주 마시기 때문에 저런 보온병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미리 말을 해두면 저렇게 따뜻한 물을 게르로 가져다 주시기도 하고 시간 맞춰 난로에 물도 피워 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따뜻한 물을 언제든 받아갈 수 있게 큰 통을 두는 곳도 있으니 캠프 식당에 가면 미리 체크해 볼 것.

 

 

 

 

에덴은 어제 먹었던 보드카보다 목넘김이 훨씬 부드러웠다. 보온통 안에 얼음이 살아있어서 토닉워터에 얼음까지 넣고 제대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단 걸 싫어하는 나는 토닉워터 없이 얼음이랑 레몬만 넣고 마셨는데, 라면이랑은 그쪽이 훨씬 맛있고 잘 어울렸다. 친구들과 술잔을 (또)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참 즐거웠다.

 

몽골에 오면 할 일이 없을 테니 음악도 들어야 하고 팟캐스트도 들어야 하고 영화도 보려고 준비해 왔는데, 난로에 불도 봐야 하지 짐도 정리해야 하지 상도 차리고 치우길 반복해야 하지 생각보다 바빠서 딱히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차에서는 모두 자기 바빴고. 그래서 저녁마다 함께하는데도 우리는 이야기할 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처음 같이하는 여행이라 괜찮을지 걱정이 많았는데 괜한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린 그저 행복했다. 새벽이 되니 우리가 놀던 방에 있는 난로에 불이 슬슬 꺼졌다. 조금만 신경을 다른 데 쏟으면 장작이 다 타버리고 불씨가 죽어버린다. 이미 불씨도 다 죽었길래 내 방에서 불씨를 옮겨와 볼 참으로 밖으로 나왔다(이직하는 친구를 위해 초코파이 케익을 준비해 올 핑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셋이 다 같이 밖으로 나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게르 안에 키를 걸어두고 나왔던 것이다. 이 곳은 열쇠를 안팎에서 돌려서 문을 잠그고 여는 현관이었는데, 문이 닫히면서 우연히 문고리가 돌아갔는지 게르 문이 잠겨버렸다. 가지고 있던 실핀으로 쑤셔 보기도 하고 문고리를 흔들어 보기도 하며 별 수를 다 써봤지만 문이 꼼짝도 안 했고 뜯고 들어갈 만한 창구멍도 없었다. 화장실 옆 창으로 들어갈 공간이 나올 지 보고 있는데, 안에서 우리가 틀어둔 노래가 속도 모르고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하다하다 스피커가 얄미워진다.

 

 

결국 우리는 내 게르로 들어갔다. 술상과 틀어둔 음악을 그대로 두고. 싱글 침대 하나와 더블 침대 하나가 있는 곳이라 셋이 잘 순 있었다. 이미 시간이 새벽 2시였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고 문을 따겠다고 큰 소리를 낼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어차피 안 될 거 뭐 어쩌겠나, 우리는 특유의 긍정을 발휘해 내 방의 난로에 장작이나 더 채웠다. 별을 볼까 했지만 캠프에 가로등이 많아 밖이 너무 밝았다. 이래저래 안 되겠다 싶어, 더 이상의 생각을 접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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