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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노르웨이 3대 트레킹 도장깨기

6-2. 드디어 트롤의 혓바닥 위로 (2)

by 이냐니뇨 2022. 10. 9.

얼마나 지났을까. 눈밭을 헤치고 땀들 뻘뻘 흘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숨이 차올랐지만 고개를 들면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이 날 움직이게 했다. 이만큼 온 이상 돌아 내려가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앞으로 가는 수 밖에.

 

잠깐 그러다 말 줄 알았던 궂은 날씨가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어제 프레이케스톨렌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악몽이 자꾸 날 괴롭혔다. 프레이케스톨렌은 쉽기라도 했지, 12시간 짜리 코스를 올라왔는데 설마 아무도 못보게 되는 걸까?

 

복잡한 마음을 안고 어느덧 정상에 다다라 갔다. 계곡은 산 아래쪽에서보다 짙은 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먼 나라까지 왔는데, 지구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자비를 베풀지 않을 줄이야.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가다 보니, 안개를 뚫고 드디어 하당에르 피오르드(Hardangerfjord)*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커튼을 걷어 놓은 것처럼 피오르드가 있는 부분만 안개가 걷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벅차 오르던지! 나는 이미 트롤퉁가와 하당에르 피오르드에 반해 버렸다.

* 하당에르 피오르드 : 노르웨이의 4대 피오르드 중 하나로, 트롤퉁가는 하당에르 피오르드의 전망대 중 하나이다.

 

온전한 풍경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웅장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피오르드를 둘러 싼 병풍 같은 높은 산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고작 시냇물만도 못하게 보였다. 그 안에 놓인 사람들은 온갖 포즈를 잡으며 인증샷을 찍고 있었지만 이 안에서는 점 하나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오르는 내내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것 같았지만, 이 모습을 보고는 어쨌든 내가 이겼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 커다란 행복감이었다.

 

 

이번에도 안개가 걷히길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위에서 각자의 속도로 걷느라 잠시 헤어졌던 일행인 커플을 다시 만났다. 내가 왜 안오나 기다렸다면서 인증샷도 찍어 주기로 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산 위는 몹시 추웠다. 눈밭에서 땀을 뻘뻘 흘려 가며 걸었으니 정상의 차가운 바람에 땀이 식으며 몸이 덜덜 떨려왔다. 등산 초짜인 나는 옷을 충분히 챙겨오지 못해서 가지고 온 플리스 자켓만 한 겹 더 걸치고 떨고 있었다. 가방에는 차가운 샌드위치와 생수 한 병만 있을 뿐. 우리는 잠깐 숨을 돌리며 각자 가져온 점심을 꺼내 먹었고, 곧 일행은 챙겨왔던 따뜻한 차를 꺼내어 나에게 나눠 주었다. 온기가 돌자 살 것 같았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안개가 걷히길 기다려 볼 수 있게 되었다.

 

인증샷을 찍으려고 줄 서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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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기다리자 트롤이 안개와 구름을 걷어주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날이 눈에 띄게 밝아졌고, 우리는 줄을 서서 사진을 찍었다. 잊지 않고 태극기도 챙겨가서 사진을 찍었지만, 추위에 떠느라 제대로 들고 있지를 못해서 잘 나온 사진은 건지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앞에 보이는 광경이 너무 예쁘고 그 속에 내가 있다는 게 중요할 뿐이었다.

 

이 날을 기다려서 산 나의 빨간색 등산 자켓도 제 값을 했다. 온통 파란색인 풍경 속에 있어야 하니 빨간색으로 골랏는데, 정말 눈에 잘 띄었다. 혹시 노르웨이 트레킹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 있다면 빨간색이나 노란색 옷을 추천한다.

 

 

이 날 정상에서 보았던 벅찬 감정이 날 아직까지 산에 오르게 한다. 생각해보니 나는 정상에서 호수나 강이 보이는 산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 날을 떠올리게 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잊고 그저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세상의 전부처럼 여겨졌던 그 순간과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반겨준 아름다운 광경을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얼마 전에도 등산자켓이랑 등산화를 장만했다(이상한 결론인 거 안다).

 

 

아, 참고로 그땐 몰랐던 사실이지만 산 위의 날씨를 미리 체크할 수 있다고 한다. 원래 고지대는 구름과 가깝기 때문인지 날씨가 변덕스럽긴 하다. 그래도 미리 날씨를 체크하고 가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6월은 여름이 시작할 때라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길은 다 뚫려 있어 입산을 제한하지는 않지만 체력적으로 훨씬 힘들기도 하고, 도시간 이동을 할 때는 본격적인 여름인 6월 말 또는 7월부터 열리는 도로도 있으니 가능하다면 한여름에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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