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인하고 잠시 쉬고 짐을 풀었다가 다음 일정을 향해 길을 나선다. 오늘의 일정_최종_최종_진짜최종(여행기 언제 다 쓰지?). 여행 준비를 잘 못했을 때, 혼자 다녀서 사진을 건질 수 없을 때 나의 팁이 있다면 그 도시를 만나는 첫날 짧은 시내 투어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왠지 포르투갈의 이미지는 오렌지빛이라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선셋 투어를 예약했다. 라라 가이드님의 3시간짜리 선셋 투어.
12월 비수기에 방문했더니 운 좋게도 가이드님이 나 한 명만 예약했는데도 투어를 진행해 주셔서 의도치 않게 VIP 단독투어가 됐다. 덕분에 물어보고 싶은 것도 다 물어보고 여행 팁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시내 이곳저곳을 보여주시는데 까사 두 알렌테주(이슬람식 궁전 건물) 같은 곳은 나 혼자였다면 찾지 못했을 것 같아서 좋았다. 3시간 뿐이어서 그런 지, 겨울이라 해가 짧아서 그런 지 약간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기분이었지만 사진도 잘 찍어 주셔서 혼자 여행에서의 갈증을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그래비티 거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유럽 양식의 건물들이면서도 조금은 때묻고 바랜 듯한 리스본 특유의 도시 색감이 그림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미국에서 보는 그래비티들은 조금 반항적이고 색채가 진한 느낌이었는데, 여기서는 그래비티라기보단 그냥 벽화다.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감성적인 그림들이 많았다.
터널에 등나무를 그려둔 곳이 꽤나 인상깊었는데, 콘크리트 색 그대로였다면 칙칙하고 조금은 무서웠을 터널을 화사하게 바꿔주었다. 가지에 액자가 걸린 듯한 모습도 정말 귀여웠다. 거의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 가며(가이드님 감사합니다!) 비 그친 리스본을 만끽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사실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 위치가 조금 외져서 밤에 혼자 가기엔 무섭겠다 싶은 곳이었는데 투어로 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리스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심지어 입장료도 없는 전망대. 사람들이 꽤 모여있었지만 시야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뒤편에 작은 카페가 있어서 포르투갈의 명물이라는 그린와인(Verde, 초록이라는 뜻)을 시켜보기로 했다. 시내 전경을 내려다 보며 카페에 앉아 와인을 홀짝이고 있으니 나 제법 유러피안 같다. 12월에도 많이 춥지 않은 포르투갈이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12월 포르투갈의 낮 기온은 15도 정도.
평소에 와인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몇 가지 종류에 대한 상식 정도는 있었는데, 그린와인이라는 건 처음 들어봐서 신기했다. 껍질을 사용하지 않고 만드는 화이트 와인의 한 종류인데, 숙성을 거의 시키지 않아 상큼하고 가벼운 맛이 드는 게 특징이다. 나중에 이 맛에 반해서, 그리고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편이라 저렴한 그린와인을 한 병 사 와서 먹었는데, 회랑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와인을 홀짝이고 있으니 곧 해가 진다. 구름이 많아 해가 지는 모습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낮에 무척 흐리던 날씨가 조금 개어 노을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덕분에 해가 더 빨리 져서 야경을 잘 본 것 같기도 하고. 그 길로 그라사 전망대까지. 시야가 무척 좋아 낮에 갔던 상 조르주 성이랑 숙소가 있는 호시우 광장 근처가 모두 보인다. 리스본에서 본 어느 풍경보다 좋았다. 전망대는 꼭 가는 게 좋겠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 조명이 환히 들어온 바이후 알투(Bairro Alto)에 갔다. 낮에 서점 때문에 찾아갔던 곳인데 조명이 들어오니 분위기가 무척 다르다. 그리고 아침에는 한산하던 거리에 사람이 가득 차서 활기가 느껴져 나까지 업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보는 시내에 대한 감흥은 거기까지가 전부다. 파두 식당도 있어서 알려 주셨는데 크게 흥미가 돋지 않아 가보진 않았다.
대신 투어를 마치고 가이드님께 바로 맛집을 소개 받아 뽈뽀(문어 요리)를 먹으러 갔다. El-Rei Dom Frango라는 레스토랑. 현금만 받는 곳이긴 한데, 문어가 말도 안 되게 부드럽고 고소하고 맛있다. 포르투갈에서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문어를 요리하기 전에 부드러워지도록 오랜 시간 두드린다고 한다. 그 정성 덕분에 엄청난 요리가 탄생했겠지. 마늘이랑 올리브유 말고는 특별한 양념이 없어 보이는데, 풍미가 참 좋았다. 나 혼자 한 마리를 흡입했다. 몹시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호시우 광장의 크리스마스 조명까지 구경하며 후식으로 에그타르트(나타)를 하나 사 먹었다. 포르투갈에 오니 골목마다 에그타르트 집이 하나씩은 있고 가격도 1~2유로 정도로 저렴하다. 각 잡고 먹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에그타르트를 참을 수가 있어야지(원래 한국에서도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를 좋아해서 찾아 먹고는 한다). 시나몬 톡톡 뿌려 맛보는 뜨끈한 에그타르트는 천국 그 자체였다. 부드럽고 향긋하지만 너무 달지 않은 그 맛! 겹겹이 부서지는 페스츄리 시트까지. 어느덧 나를 지배하던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리스본에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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