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해가 스멀스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12월이 유독 비가 많이 온다고 하던데, 그래봐야 얼마나 되겠냐고 만만하게 봤는데 미리 말하자면 여행하는 내내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산을 들고 다녀야 했다. 비 오는 날을 정말 싫어해서 한국에서도 비 오는 날은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는 나인데 우기의 한복판으로 날아오다니.
그래도 다행히 점심때가 가까워 오자 날이 점점 맑아졌다. 어제 도착할 때만 해도 한국의 여름 장마비처럼 쏟아져 내렸는데, 오늘은 부슬부슬 오더니 조금씩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행 중엔 그 모든 것보다 날씨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난 자연 앞에서 한낱 미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하늘이 보이고, 안 보이고에 따라 이렇게나 달라지니 말이다.
덕분에 코르메시우 광장의 바닷가 풍경을 더 즐길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 옆에 길쭉하게, 바닷가를 따라 위치한 나라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나고 자란 곳,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곳 모두 내륙 지방이라 바다와 그리 친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를 보면 이곳 사람들의 삶을 어떨까 한 번씩 생각해 보게 된다. 바닷가를 따라 조깅하면 어떨까? 파도를 매일같이 가까이서 보려나? 하면서.
그리고 코르메시우 광장은 바닷가를 끼고 있는 해변 공원이다. 우리나라의 바닷가 공원들은 뭐랄까, 좀더 자연친화적인 모습인데 도시적인 바닷가 공원이 아름답다고 여겨지진 않더라도 이국적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이 앞에 있는 타임아웃 마켓에도 먹을 게 많다고 하더라. 나에게는 눈에 띄는 게 없어 산책만 하고 돌아오기로 한다.
그리고 어제 산 비바비아젬 카드가 있으니 여기에서 바로 상 조르주 성으로 향했다. 날씨가 이렇게 좋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나다니는 걸 줄곧 지켜본 트램을 드디어 탄다. 트램의 도시답게 시내 안에는 그 어느 것보다 트램이 많이 지나다닌다. 골목골목을 누비는 오랜 교통수단인 만큼 비좁은 거리를 무서울 만큼 바짝 붙어서 지나가는 게 심장 쫄깃하다. 걸어 다니다가 그런 트램에 탄 사람들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많이 지켜봤는데, 이제는 내가 탈 차례다. 리스본 트램의 아이콘 28번 트램을 타고 길을 떠난다.
트램에서 내려 골목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야 성이 나온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답게 계단을 오루고 경사로를 오르며 길치인 관계로 길을 잘 못 찾아 조금 헤맸지만 골목의 풍경이 너무 귀여워 신이 났다. 리스본의 골목길은 세월의 흔적과 때가 고스란히 느껴지지만 그 와중에도 어떤 발랄함이 곁들여져 있다. 그리고 그게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성의 입장료는 10유로로 꽤나 저렴한 이곳 물가를 생각하면 비싼 편이었는데(지금은 더 올라서 15유로라고 함), 급하게 온 여행이라 공부를 많이 못 하고 와서 그 가치를 느끼긴 어려웠다. 나중에 찾아보니 12세기에 이 곳을 점령하고 있던 무어족을 몰아내고 지은 요새 역할의 성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서 뷰를 보기 위해 찾는다. 이런 곳을 찾을 때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졌다는 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 봤을 때 한쪽에 보이는 바다의 모습과 붉은 지붕이 모여 있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동유럽의 주황색 지붕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지만 여기는 좀 더 어둡고 낡은 느낌이었고 바다가 이 모든 걸 품고 있는 것 같아 더 아늑해 보였다. 기다려 왔던 풍경을 보고 나니 비로소 내가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왔다는 게 실감 나며 벅차게 행복해졌다. 여기서 커다란 쉼표를 찍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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