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구인/몽골몽골, 우리의 여름

7-3. 날씨요정님이 퇴장하셨습니다

by 이냐니뇨 2023. 9. 25.

 

 

산책을 하면서 여유를 부리는 와중에 점점 구름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저 먼 곳의 구름까지도 훤히 보이는 몽골). 바람이 점점 많이 불고 살에 닿는 느낌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어째 구름이 끼는 곳이 사막 쪽이라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산책길은 더 가면 너무 멀리까지 가게 될 것 같아서 우리는 길을 되돌아와 조금 일찍 식사 장소인 한보즈(Khaan Buuz) 휴게소로 가서 카페에 앉아 있기로 했다. 그동안 의외로 마냥 여유를 즐기기엔 빠듯한 일정이기도 했고 몽골에서는 시원한 음료를 사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을 수 있는 곳은 더더욱 없어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나는 커피를 안 마시지만 같이 간 친구들은 기회만 되면 아아 찾는 한국인들).

 

휴게소는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편의점 같은 것이 하나 있고, 카페랑 푸드코트, 공용화장실이 있었다. 울란바토르에서 나와 여행을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들렀다 가는 곳인 것 같았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궂은 날씨에도 사람이 많았다. 비까지 오니 앉을 수 있는 자리도 몇 없었다. 일단은 편의점에 들러 마실 음료수랑 저녁에 먹을 맥주를 샀고, 카페에 들러 커피도 사들고 나와 하늘을 지켜보았다.

 

 

귀여운 화장실 표시와 맛있었던 체리 주스.

 

 

오늘 저녁은 일식. 슬슬 다양하지 않은 몽골 현지식 돌려막기에 조금은 질리고 있었는데(평소에 같은 메뉴 연달아 못 먹는 사람) 잘 된 일이었다. 바람이 차가워지니 라멘이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 이번에도 우리는 골고루 시켜 나눠 먹기로 하고 라멘, 돈가스, 볶음밥을 골랐다.

 

라멘은 정말 맛있었다. 국물도 따뜻하고 좋았다.신기하게도 미역이 들어있었는데 일본에 가보지 않아서 이게 현지식인지 몽골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어울렸다. 볶음밥은 국적 불명이었으나 버터향이 물씬 나고 맛있었는데 역시 몽골답게 한 바가지 나왔다. 돈가스는 오랜만에 먹는 돼지고기라 반가웠는데, 튀김옷이 얼마 전에 먹은 치킨이랑 똑같았다. 그래서인지 맛도 비슷해서 눅눅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튀긴 건 다 맛있지. 오늘 저녁도 코를 박다시피 하면서 맛있게 해치웠다.

 

 

 

 

밥을 먹고 있으니 어느덧 우리가 있는 쪽에도 하늘이 어두워지고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해질녘의 붉은 사막을 보면서 예쁜 사진도 찍고 낙타도 타고 싶었는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제법 굵어서 걱정스러워졌다. 홉스골에서처럼 잠깐의 소나기이길 바라며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려 보지만 아직은 비가 그칠 기색이 없었다.

 

일정이 겹친 우리팀과 옆팀, 두 팀의 가이드님들과 기사님들은 날씨를 보고 대책 회의를 하고 계시는 듯했다. 곧 일정을 조금 바꾸어 저녁을 먹고 사막을 가보자고, 상황이 좋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들렀다 가자고 하셨다. 오늘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나면 버리려고 낡은 옷가지와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이걸 내일 또 입어야 하는 건가, 모래밭에서 뒹굴고 또 씻지도 못한 채로 울란바토르 시내로 나가야 하는 건가, 걱정이 많았다. 점점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일정을 강행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한여름 장맛비처럼 굵은 빗줄기가 한참을 내리는 통에 결국 일단 숙소로 돌아온 우리들. 미련은 많았지만 꼼짝없이 내일 아침에 가야겠구나, 포기하게 됐다. 그나저나 사막인데 비가 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그런데 조금씩 빗줄기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저기 사막 쪽에는 구름이 걷히는 듯도 했다. 우리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걸까? 착하게 살아야겠다. 감사한 마음으로 위에 바람막이 한 겹을 더 겹쳐 입고 목이 긴 양말을 챙겨 신고 길을 나섰다. 몽골까지 우비를 챙겨 갔었지만 낙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혹시 놀라진 않을까 싶어서 차마 입진 못했다. 행여라도 꾸물거리면 일정이 취소될까 봐 후다닥 물건을 챙겨서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미니 사막이라고 불리는 엘승타사르하이였다. 초원 한가운데에 꽤 큰 사막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비가 온 직후라 날이 흐려서 노을을 볼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모래가 바람에 날리지도 않고 햇빛에 얼굴이 탈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어 편하긴 했다. 꽤 많이 온 비 때문에 사막 중간에 물웅덩이가 생겼는데 우린 그걸 보고 오아시스라면서 낄낄거렸다.

 

 

우리가 발견한 엘승타사르하이의 오아시스.

 

 

어느새 연락을 해두셨는지 낙타들이 얌전히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낙타였다. 냄새가 많이 난다고들 해서 걱정했는데, 날이 추워서인지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낙타는 혹 사이에 타는 거라 말보다 좀더 안정감이 있었는데 키가 더 커서 더 높았다. 낙타가 앉고 일어날 때 앞뒤로 크게 출렁여서 그때는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했는데, 무릎이 두 개인지 두 번 꺾이는 게 느껴졌다. 낙타는 그거 말고는 옆에서 사람이 걸어서 따라올 수 있을 만큼 천천히 걸어서 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낙타 등이 따뜻해서 기분이 괜히 좋았는데, 털이 젖어 있고 흙이 좀 묻어 있어서 끼고 간 장갑은 다 젖어버렸다. 아쉽게도 모래가 미끄러워 언덕 끝까지 올라가진 못하고 낙타 체험은 빠르게 끝났다.

 

 

 

 

우리는 곧 썰매를 타기 위해 맨발로 사막 모래를 느껴보았다. 언제 챙기셨는 지 트렁크에서 썰매 하나씩을 꺼내 우리에게 나눠주셨다. 우리는 사이좋게 썰매 하나씩을 들고 언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고운 모래가 단단한지 빗물이 깊이 스며들지는 않았고 발을 디디니 부드럽고 따뜻한 마른 모래를 느낄 수 있었다. 걷기는 좀 힘들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감촉이었다. 모래에 발이 빠지는 곳이라 신발은 이미 차에 두고 왔다.

 

어느덧 한두방울씩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에 손이 젖어들고 카메라 렌즈에도 물이 묻어서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없었는데, 그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그만큼 눈과 마음에 이 모습을 열심히 담아 보았다. 바짓단이 긴 걸 입고 갔었는데 바닥이 젖어 들어 오니 바지에 모래가 붙어 점점 무거워졌다. 풀밭도 이슬에 젖고 모래도 비에 젖는 몽골에서는 바짓단 긴 옷이 적절하지 않다는 걸 많이 깨닫는다.

 

 

 

 

드디어 언덕 꼭대기에 올라 썰매를 타는 시간. 오히려 살짝 젖은 모래 덕분에 썰매가 잘 미끄러져서 너무너무 재밌었다. 얕은 언덕과 가파른 언덕 두 곳이 있었는데, 얼마 전 '택배는 몽골몽골'이라는 예능에서 썰매타러 가는 게 나오더라. 얕은 언덕에서는 썰매가 잘 나가지 않는 걸 보고 비가 와서 오히려 좋았던 거구나, 깨달았다. 썰매는 진짜 재밌었다. 예전에 호주에서 샌드보드를 타본 적이 있었는데 썰매가 좀 더 몸이 편하고 언덕을 즐기기 편했달까? 늦은 시간이라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서 더 많이 타지 못한 게 너무너무너무 아쉬웠다.

 

 

 

 

 

비에 젖고 모래 범벅이 된 우리 꼴을 본 기사님이 차에 타지 말라고 장난을 치셨다. 웃으면서 얘기해주셨지만 실제로도 발에 모래가 너무 많이 묻어서 차에 타기 죄송스럽긴 했다. 가지고 갔던 양말은 어차피 버려야 했기에 양말로 최대한 발을 닦아내고 차에 올라탔다.

 

날씨 때문에 오늘 별을 보긴 글렀고 추운데 보일러가 되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대신 친구가 아이패드에 받아 온 영화를 보며 맥주를 먹고 수다 떠는 저녁을 보냈다. 그동안 밤만 되면 별 보러 나가느라, 난롯불을 보느라 바빠서 여유가 없었는데 이렇게 오붓한 저녁시간도 참 좋았다. 어느덧 내일이면 함께하는 일정의 마지막 날. 벌써부터 이 시간이 그리워지는 것 같았다.

반응형